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
정희정 Heejung Jung, 2024
‘Unfolding the Unarrived Future’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라는 개념을 중심에 두고, 그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간의 상상과 질문을 탐구하는 전시입니다. 이 전시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손에 닿을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무수한 상상들로부터 출발합니다. 관람객들은 “당신에게 도착하지 않은 미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게 되며, 그들의 답변을 바탕으로 창작된 상상 소설은 각기 다른 시선으로 그려진 미래를 이야기합니다. 이 소설들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혹은 실현될 수 없는 가능성들에 대한 묵상을 문학적으로 풀어냅니다.
전시의 핵심은 이러한 상상의 조각들이 물리적 형태로 변형되어 ‘투명한 시간의 결정을 품은 조형물’로 나타난다는 점입니다. 레진으로 제작된 동그란 조형물은 그 안에 고정되지 않은 추상적인 형상을 담고 있습니다. 마치 시간 속에서 굳어버린 순간의 단면처럼, 이 조형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미래를 압축하여 하나의 구체로 형상화합니다. 그 안에 담긴 형태들은 완벽하지 않은 불확실성을 상징하며, 관람객들은 이 투명한 구체를 통해 자신의 상상 속 미래를 투영하게 됩니다.
이 전시는 무엇보다도 ‘미래’라는 개념을 다시금 사유하게 만듭니다. 도착하지 않은 미래는 우리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변주될 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입니다. 전시는 그 가능성들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면서도, 구체화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열린 질문을 던집니다. ‘Unfolding the Unarrived Future’는 우리에게, 여전히 도착하지 않은 미래를 상상할 여백을 제공하고, 그 속에서 우리가 그려내는 미래란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을 선사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자유로운 삶
기다리는 이. 최혜원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창문을 비출 때, 혜원은 눈을 떴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오늘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혹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는 압박감. 하지만 그 생각들은 곧 희미해졌고, 그녀는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묻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눈을 감고 멍하니 있었다. 고요한 방 안에 떠도는 공기마저도 멈춘 듯한 그 순간, 자동 급식 기계의 벨이 울렸다. 평소 같으면 건조한 사료가 톡톡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사료통이 비어 있었던 것이다. 혜원은 그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고양이가 작은 울음소리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몇 번을 울며 그녀에게 사료가 없다는 신호를 보냈지만, 혜원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고양이는 그녀의 발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여전히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 순간, 고양이는 마치 포기한 듯 하품을 크게 하더니 느리게 기지개를 켰다. 그리곤 그녀의 발 밑에 몸을 동그랗게 말고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혜원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어딘가 이상한 평온함에 사로잡혔다. 그녀도, 고양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녀는 누워서 창밖의 빛을 응시했다. 햇살은 여전히 세상을 비추고 있었고, 바람은 창문 밖 어딘가에서 잔잔히 불고 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이 그녀와는 상관없는 세계처럼 느껴졌다. 세상이 돌고 있는 것과 무관하게, 이 순간 혜원은 완전히 자유로웠다. 더 이상 할 일에 대한 압박이나, 무엇을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있었다.
가만히 누워 있는 그 자체로 모든 것이 완전했다. 그녀는 더 이상 뭔가를 이루지 않아도 괜찮았다. 더 이상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아도, 무언가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괜찮았다. 고양이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발끝에 닿았다. 그 숨소리는 마치 그녀에게 말을 걸듯이 부드럽게 흘러갔다.
‘괜찮아, 그만 둬도 돼. 너는 이미 충분해.’ 혜원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세상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혜원은 그저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고양이도, 그녀도, 그리고 세상도 이미 완벽한 상태였다. 오랫동안 스스로를 옥죄어 왔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 그녀는 마침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온몸으로 느꼈다.
한참 후, 혜원은 눈을 감았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소리는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고양이의 작은 숨소리만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는 비로소 알았다. 자유란 더 이상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날, 혜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지만, 그녀는 그저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프랑스 남부에서 보내는 1년
기다리는 이. 임바야
바야는 엑상프로방스의 작은 시골 마을에 자리를 잡은 지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마을의 돌집은 여전히 바람과 햇살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고, 곳곳에 정리되지 않은 상자들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정리해나가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삶은 한가로웠다. 아침마다 들르는 빵집에서 따뜻한 바게트를 사고, 감귤 나무가 늘어선 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이 그녀의 새로운 일상이었다.
하지만 여유로운 순간에도 바야는 가끔씩 그리워지지 않아도 될 무언가를 떠올렸다. 과거에 그녀는 계획을 짜고,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하는 삶에 매달려 있었다. 정해진 시간에 모든 것이 맞춰 돌아가야 했고, 예상치 못한 상황은 해결의 대상이었다. 그런 삶에서 벗어나고자 프랑스로 왔다. 이제는 돌발 상황에 휘말리더라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어느 날, 바야는 마을 광장의 카페에 앉아 커피와 간단한 점심을 주문했다. 그녀는 천천히, 느릿하게 프랑스어로 주문했지만, 그 발음은 여전히 그녀의 입안에서 익숙하지 않았다. 잠시 후,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을 때, 그녀는 접시에 놓인 요리가 자신이 주문한 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뭘 주문한 거지?’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분명히 프랑스어로 말했지만, 발음 탓인지 웨이터는 엉뚱한 요리를 가져온 듯했다.
그녀는 영어로 웨이터에게 말을 걸었다. “이건 제가 주문한 음식이 아니에요.”
그러나 웨이터는 그녀의 영어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바야는 한순간 스스로를 의심했다. ‘내 영어 발음에 문제가 있나?’ 그녀는 영어만큼은 자신이 있었지만 영어마저 통하지 않는 이 순간, 무력감을 느꼈다.
바야는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프랑스어 어학원 정보를 검색했다.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배우지 않으면 안 되겠어.’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때, 옆 테이블에서 한 할머니가 바야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는 말이야, 다들 천천히 배우거든.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 말은 마치 긴장을 풀어주는 열쇠처럼 바야의 마음을 흔들었다. 그녀는 그 말 속에서 자신이 찾고 있던 해답을 발견한 듯했다. 계획과 통제에서 안정과 불안을 동시에 느끼며 살아온 지난 삶에서 벗어난 이유가 무엇이던가. 이곳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삶은 천천히 흘러가도, 실수가 있어도 괜찮다.
그날 밤, 바야는 집으로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녀는 문득 프랑스어로 자전적 소설을 써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지 않은 프랑스어라도, 이곳에서 보낸 1년 동안 자신이 경험한 것들을 기록하고 싶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프랑스어로 풀어내는 것,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바야는 노트를 꺼내 첫 문장을 적기 시작했다.
“Parmi les fragments flous de la langue, je trace ma vie, imparfaite mais pleinement à moi.”
(흐릿한 언어의 조각들 속에서, 불완전한 채로, 온전한 나만의 삶을 써내려 간다.)

완벽하게 무너진 삶에서 새롭게 쌓아 올리는 자유
기다리는 이. 한유승
유승은 오늘도 거실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집이라고 해야할지, ’거실’이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방, 어쩌면 그저 남은 덩그러니 작은 공간이라고 해야할지, 여전히 의문이지만, 방 한 칸에, 그가 가진 가구 중 가장 값나가는 테이블과 이케아에서 산 의자 하나만 남은 상태였다. 돈도 잃고, 집도 잃었다. 이제 남은 건 건강한 몸과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생각들뿐이었다.
그는 잠시 팔로워 수를 떠올렸다. ‘5만명’ 스스로 중얼거리며 미소를 지었다. 팔로워는 있지만,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좋아요’ 수는 줄었고, 협찬 제안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다. 돈을 벌려고 만들었던 쇼핑몰도 실패했다. 옷은 다 팔리지 않았고, 그에게 남은 것은 빚과 창고에 가득 쌓인 베이지색 자켓들이었다.
“이젠 더 잃을 것도 없지.” 유승은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은 곧바로 밝혀졌다.
어느 날 아침, 유승은 눈을 떠서 거울을 보았다.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히 그가 잘 아는 자신의 얼굴이었지만, 뭔가 달라져 있었다. 그의 코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코가 없어졌다.
“아, 이제 외모도 잃어버리는구나,” 유승은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뭐, 엄청나게 잘생긴 얼굴도 아니었으니 코쯤이야,” 그는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그는 집을 나섰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코가 없는 얼굴로도 사는 데 별로 불편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람들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유승은 가게에 들러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요.”
점원은 포스기만 쳐다보며 주문을 받았기 때문에 코가 없는 손님이 와도 놀라지 않았다. “준비되면 자리로 가져다드릴게요.”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카페에 울리던 노래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유승은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이번엔 귀가 없었다. “음, 코에 이어 귀까지 사라진 건가,” 유승은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귀가 없어도 필요한 말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 진짜 다 잃게 되는 걸까?” 유승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디까지 잃어야 다 잃었다고 할 수 있는걸까. ‘모두 잃어버리면 새로운 삶의 자유를 누릴 수 있을거야.’ 유승의 마음이 묘한 흥분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잃어갔다. 손톱도 사라졌고, 나중에는 발가락까지 사라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사라진 신체들은 그를 괴롭히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가벼워지는 기분이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몸의 절반을 잃었다. 오른쪽 팔이 사라졌을 때조차 그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이제야 다 잃어가고 있군” 하고 기대감에 약간 전율했을 뿐이었다.
유승은 카페에 앉아 있었다. 그의 왼손에는 여전히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들려 있었다. 그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신체가 계속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더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커피잔을 들 왼손마저 완전히 사라졌다. 두 다리도 이미 없어졌고, 의자 위에 남아 있는 것은 그의 심장 하나뿐이었다. 그럼에도 유승은 여전히 커피를 마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심장이 박동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 순간, 한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유승을, 그러니까 의자위에서 덩그러니 남겨저 뛰고 있는 심장을 바라보더니, 부리로 그것을 물었다. 유승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았지만, 저항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오히려 비둘기와 함께 떠나는 것이 무척 기대되었다.
비둘기는 날개를 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심장은 비둘기의 부리에 매달린 채로 도시의 하늘을 가로질렀다. 유승은 비둘기와 함께 비행하는 감각을 느꼈다. 몸은 없었지만,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분명하게 다가왔다.
“이게 자유라는 걸까?”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둘기는 한참을 날다가 어느 아파트 건물 위에 있는 에어컨 실외기 위에 심장을 내려놓았다. 그 자리는 평화로웠고, 바람이 부드럽게 심장을 감싸고 있었다. 유승은 그곳에서 멈춰서 세상을 관조했다. 그에게는 이제 시간도, 물질적인 것들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진정으로 모든 것을 잃은 상태에서 자유로워졌다.
“이제 모든 게 시작되는 건가.” 유승은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심장이 고요하게 뛰는 것을 느끼며 생각했다. 그는 여전히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가 이룬 자유는 물리적 존재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유였다.
비둘기가 다시 유승 곁으로 날아왔다. 그와 심장은 새로운 곳으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가 얻은 것은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였다. 유승은 더 이상 무엇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러나 비둘기는 자신이 물고온 심장을 잊었다. 비상하는 비둘기의 날개짓에 맞은 심장이 아파트 화단으로 굴러 떨어졌다. 데굴데굴, 유승은 알수 없는 곳으로 굴러갔다.

자연속에서 하늘을 보며 맞이하는 죽음
기다리는 이. 목해경
해경은 그날도 평소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루가 끝난 도시의 저녁은 언제나 비슷했다. 노을이 건물 사이로 길게 드리워졌고, 사람들은 무표정하게 횡단보도를 건넜다. 땅거미가 내려앉는 그 시간의 공기는 이상하게도 모든 것을 눌러버리듯 무거웠다. 하지만 그날, 그 무거움 속에서 해경은 묘한 가벼움을 느꼈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문득 인파 사이에 사슴이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사슴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평범한 일상 속에 끼어든 어떤 비현실적인 파편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해경은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슴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마음속 어딘가에서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것이 천천히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그 사슴은 해경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린 것 같았다. 해경은 잠시 눈을 떼지 못한 채 창밖을 응시했다.
“이제구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버스는 여전히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지만, 해경은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버스에서 내려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다. 집에 가는 길이었지만, 그는 이 버스를 계속 타고 있어서는 안 된다고 느꼈다. 그날이 왔다.
그가 버스에서 내리자 사슴은 이미 도로를 건너가고 있었다. 해경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그 사슴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그날, 해경은 더 이상 집에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그 끝에 도착한 것이다.
사슴은 거리를 가로질러, 도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해경은 그를 따라갔다. 처음에는 천천히 걷던 발걸음이, 어느새 달리기로 변해갔다. 그가 달리면서 느꼈던 것은 어딘가 비현실적인 감각이었다. 그는 자신이 인간의 몸을 벗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뿔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을 분명히 느꼈다. 처음에는 어깨와 목 사이에서 묘한 압박감이 올라왔고, 곧이어 머리 위에서 뭔가가 무겁게 자리를 잡았다. 나뭇가지가 뿔에 걸리면서 나무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는 그 소리를 듣고 문득 깨달았다. 사슴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시야가 점차 넓어졌다. 인간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풀잎 하나하나의 결, 나뭇가지의 흔들림, 바람의 움직임. 그 모든 것이 그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의 코는 흙냄새를 맡았다. 그 속에서 느껴지는 것은 수많은 생명과 죽음의 흔적이었다. 땅 속 깊이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그 냄새는 고요하지만 강렬했다. 죽음과 삶이 뒤섞인 냄새였다.
해경은 그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의 몸은 사슴의 것처럼 가볍고, 바람을 타고 흘러갔다. 발굽이 땅에 닿는 소리가 그의 귓가에 생생하게 울렸다. 그 소리는 인간의 발걸음과는 달랐다. 발바닥이 아닌 발굽이 땅에 박힐 때마다, 그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해경은 산 정상에 도달했다. 바위 위에 선 사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해경은 그 사슴을 따라 계속 달렸다. 달리는 동안, 그는 완전히 사슴이 되어갔다. 그의 몸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이제 발끝까지 완전한 사슴이었다. 그 감각은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익숙했다. 인간일 때보다 훨씬 가볍고, 세상의 모든 소리를 더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상에 도착한 순간, 해경은 풀썩 쓰러졌다. 고요한 평화가 그를 감쌌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슴이 된 그의 눈에 비친 하늘은 인간으로서 본 하늘과는 완전히 달랐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었다. 하늘, 땅, 그리고 그 자신. 그 모든 것이 하나의 흐름 속에 녹아들고 있었다.
죽음이란, 그저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일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그의 털을 쓰다듬었고, 나무들이 하늘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인간의 고통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았다. 그저 그 순간, 자연과 완전히 하나가 된 자신의 존재만이 남아 있었다.
사슴이 된 해경의 두 눈은,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했다.

콩나물 무 냉국과 결혼식
기다리는 이. 아키씨
아키의 인생은 늘 질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세상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사는 걸까? 사랑은 왜 이렇게 복잡한 걸까? 그러나 세상은 그의 질문에 언제나 모호한 답만 내놓았다. 어른이 된 그는 인생도서관이라는 이름의 비즈니스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들이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 일이다.
하지만 정작 아키 자신은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인생의 중요한 질문들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그는 매일 밤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를 열고 콩나물 무 냉국을 꺼내며, 그 안에서조차 답을 찾으려 했다. 그가 스스로 만든 그 시원한 냉국이야말로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하지만 답은 여전히 그를 피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아키는 냉장고를 열었을 때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다. 콩나물 무 냉국이 뭔가 다른 빛을 띄고 있었다. 냉장고 속에서 미세한 파장이 일어났고, 아키는 얼어붙은 듯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냉국에서 빛이 새어나오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외계인이었다. 콩나물과 무 사이에서 서서히 떠오른 작은 형체는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묘한 온도였다. 그는 눈을 깜빡이며 그 형체를 바라보았다. 외계인은 냉국에서 나온 것치고는 너무나 차분하게 아키를 바라보았다.
“넌 누구지?” 아키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진 수많은 질문처럼 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말이었다. 외계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나는 네가 던진 질문의 끝에 있는 답이야.”
아키는 그 대답에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이 마음속 깊은 곳을 간질였다. 평생을 질문에 매달려 있던 그에게, 이 간단한 대답이 왠지 적확하게 느껴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외계인은 천천히 그의 눈을 응시했고, 아키는 그 눈 속에서 오랜 답을 찾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이후, 외계인은 그의 집에 머물렀다. 아키는 자신이 한 질문들에 대한 외계인의 답을 들어보았다. 처음엔 사소한 것부터 시작했다. “왜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답을 알아채지 못할까?” 아키가 물었다 외계인은 잠시 조용히 있다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진짜 마주해야 할 답이 아니라, 자신을 안심시키는 답을 고르지.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답이 더 편하니까.”
아키는 가만히 외계인의 말을 기다렸다. 외계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키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답은 오래가지 않아. 결국 사람들은 불안해지거든. 속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어. 그때가 되면 다시 질문을 던지게 돼. 그래서 답을 찾는 일이 끝나지 않는 거야.” 아키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외계인의 말은 마치 자신에게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애써 외면했던 진실을 부드럽게 드러내는 것 같았다. 아키는 그 대답이 너무나 명쾌하게 느껴졌다. 그간 수없이 많은 철학책과 심리학 논문을 읽어왔지만, 그 누구도 이처럼 간결하게 답하지는 못했다. 외계인은 그런 식으로, 아키가 평생을 던져왔던 질문에 대해 담담하게 대답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아키는 뜬금없이 물었다. “결혼이란 뭘까?”
외계인은 한참 동안 조용히 있었다. 그 침묵 속에서 아키는 그가 준비된 답을 찾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더니 외계인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결혼이란, 인간에게는 서로의 존재를 공식화하는 과정이야.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게 필요 없어. 우리는 이미 존재 자체로 충분하니까.”
그 말에 아키는 순간 깨달았다. 외계인이 자신에게 던진 답이 그를 완전히 흔들어 놓았다. 결혼이란 굳이 법적 제도나 사회적 기준에 따라 이루어질 필요는 없었다. 중요한 건 존재를 함께하는 것이었다. 그는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질문을 평생 붙들고 있었지만, 이제 답을 찾았다.
아키는 외계인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외계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결혼에 대해 특별한 의식도, 법적 절차도 거치지 않았다. 그저 아키가 차린 간단한 콩나물 무 냉국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아키는 외계인과 함께 냉국을 한 모금 마셨다. 그 시원한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마치 인생의 모든 질문들이 한데 모여 사라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외계인과의 결혼이야말로 그가 평생 찾아 헤맨 마지막 질문의 답이라는 것을 알았다.
결혼식은 그렇게 끝났다. 아무런 법적 문서도, 축하 인사도 없었다. 그저 그 둘 사이의 이해와 존재의 인정이 그들에게는 충분했다. 아키는 문득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래, 이게 결혼이었구나.”
외계인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속에서 아키는 또 다른 질문을 떠올렸지만, 그것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이미 충분한 답을 얻었다.
사람들은 여전히 아키가 누구와 결혼했는지 궁금해했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외계인과 결혼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매일 냉장고를 열 때마다, 여전히 그곳엔 냉국이 있었고, 외계인의 존재가 희미하게나마 느껴졌다.
결혼이란 무엇인가? 그 질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아키는 답을 찾았고, 그 답은 너무나도 간단했다. 그는 문득 혼자 웃으며 냉국을 한 모금 더 마셨다. “그래, 이렇게 사는 거지.”
